
오해

21살 때부터였나, '오해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싫어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사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게 된다더라.
그게 일적인 소통이든 사적인 소통이든, 돈이 걸려있는 소통이든 사랑이 오고가는 소통이든.
근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단어 순서의 차이 때문에 혹은 비/반언어적 표현의 차이 때문에
심지어는 발화자가 똑같은 말을 했다해도 듣는 사람의 성격과 배경 차이 때문에
그 정도만 다를 뿐이지 오해 자체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20대 초반의 나를 힘들게 했다.
특히 사람들이 가진 각각의 고유한 배경에 대해 철학자 롤스는 -완전 일치하는 맥락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문화적 다원성이란 본래 서로 너무도 다르고 또 명확한 것이어서 화해가 불가능한 종류의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나.
사람들간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여기에서 탄생하는 필연적인 오해의 가능성.
내가 살면서 전달했던 표현들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내가 의도한 바 그대로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게 도달했던 표현들 또한 단 한번도 상대방이 의도한 그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는 미련 앞에서
나는 단순한 아쉬움을 넘어 쉬이 무기력해지곤 했다.
"어차피 평생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살아야 한다면 오해 같은 건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게끔 만들어졌어야지"라면서,
휴대폰 제조사에게 애저녁에 고장을 안 나게끔 만들면 되지 않느냐 따지는 것보다 낮은 수준의 불평들을 늘어놓았다.
이런 오해 가능성을 없애고 싶어서 논리기호 기반의 새로운 언어까지 설계했다던 17세기 수학자 라이프니츠의 정신을 그리워하며, 하여튼간 이 오해 가능성이란 놈은 어떻게든 응당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임이 확실하다고 자주 되뇌었다.
꽤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았다.
그러다가 작년 어느 날 정말 우연히 시(詩)를 좋아하시는 분을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시가 매력적인 이유는 "행간의 여백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예컨대 작가가 A라는 의미를 의도하고 쓴 시인데, 사람들은 그걸 읽고는
A'나 A"로, 또는 B나 C로, 심지어는 ㄱ, ㄴ, ㄷ, ㄹ으로도 해석한다고. 각자 자신이 살아온 삶의 시간과 경험과 지식을 투영시켜서.
거기에 바로 시의 매력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달리 말하면 시는 독자들이 오해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라는 거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내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우리가 오해를 하면서 살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형형색색일 수 있는 거겠구나. 오해를 하기 때문에 세상에 없던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고, 새로운 감정들이 싹틀 수 있고, 다른 이들과 희노애락을 나누며 살 수 있는 것이기도 하겠구나 싶어서.
마치 엔트로피가 계속 증가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느꼈다. 사람들간의 소통에도 엔트로피가 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하지 않는다면 A로 시작된 것은 수백 수천년이 지나도 A 그대로 남아있겠지만, 오해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A' A''도 되고 B C도 되고 ㄱㄴㄷㄹ도 되며 사방군데로 뻗어나가는 거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이 더 멋져지고 알록달록해질 수 있는 이유인 셈이다.
우리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물론 여전히 고통스럽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로써 이제는 바라보려 하고 있다. 어쩌면 소통의 목적은 애초에 의도의 완벽한 전달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의미의 탄생에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