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PT에서의 기억 #1
01. 솝트를 알게 되다
전역할 때 즈음이면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있겠지 - 하는 자조 섞인 잡념을 집에 남겨 두고 21년 9월 군에 입대했다. 가장 회의감이 많이 든다는 상병 3-4호봉 시기에 거의 아들 군번 뻘의 신병이 한 명 들어왔다. 신병은 첫 자기소개 때부터 창업을 할 거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부대에서 창업 얘기를 나눌 사람이 많지 않았던지라 유난히 반가운 마음에 금방 말문을 텄던 것 같다.
하루는 신병이 저녁 점호 시간 전 다목적실 소파에 앉아있는 내게 물어봤다.
"김상병님 혹시 솝트 라고 아십니까?"
"솝 뭐?"
그 친구가 말하길, 솝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생 창업 동아리라고 했다. 나는 일찍부터 창업 동아리 같은 학생 단체의 무용론을 주장해왔기에 당연히 알고 있지도 못했거니와 내 관심을 끄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 것도 있나보구나' 하며 넘겼던 것 같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23년 3월이 되었고 평생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전역식도 치렀다. 학교에 복학은 했는데 매번 혼자서 프로젝트 하는 것도 마침 질렸을 시절, 뭐든 좋으니 협업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신병이 알려준 솝트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02. 열심히 준비하게 된 계기
사실 솝트 지원 이전에 인액터스라는 학교 동아리에 지원했다가 낙방했다. 원래부터 상황 안 가렸던 개그욕심에 군대 갓 나온 전역자의 객기가 섞여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을 첨부해주세요"
라는 문항에다가 눈알 뒤집어 뜬 엽사 사진 첨부한 탓이 컸던 것 같다.
근데 그렇게 쓴 지원서가 서류전형 통과했길래, 임원진들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일 거라 생각하고 면접에도 편하게 갔다. 추리닝에 후드티 한 장 걸치고. 면접관 분들은 면접 도중 내 엽사가 계속 보였는지 시종일관 웃참을 하시길래 나도 계속 웃으면서 장난을 쳐드렸다. 맨 왼쪽에 앉아계셨던 남학생 분은 왜인지 표정이 좋지 않아보인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최종 불합격 문자를 받았다.
원래는 인액터스를 들어가게 되면 솝트는 쓸지 말지 고민해봐야겠다 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A안이 없어졌으니 B안에 집중해야 했다. 솝트 지원서를 쓸 때는 인액터스 때와는 달리 정말 열심히 썼다. 말하고 싶은 내용은 전부 욱여넣고 평소엔 하지 않을 만한 셀프 자랑도 몇 줄 섞어서. 면접 준비도 열심히 했다. 면접 준비 1분도 하지 않았던 인액터스 때와는 다르게 거진 하루를 다 써서 준비했다. 내가 면접관이면 나한테 뭘 물어보고 싶을까 고민도 해보고, 종일 구글링하며 이전 기수 지원서 문항이나 면접 질문들 모아서 답변을 준비하고는 통째로 외워갔다.
03. 효재 그리고 상언이 형과의 만남
면접장에서 효재를 처음 만났다. 첫 만남부터 왜인지 모를 친근한 인상을 풍겼던 효재는 솝트 32기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부회장 보미와 함께 2:3으로 진행된 회장단 면접은 매우 순조로이 진행됐다. 대부분의 질문이 내가 준비했던 주제의 것들이라 난 그냥 머릿속에서 답변 끄집어내기만 했다.
면접이 거의 끝나갈 때 즈음 효재가 내게 스스로의 단점이 있다면 뭐가 있을 것 같냐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정말 진심 100%로 대답하고 싶어서 조금 고민하다가, "혼자서 프로젝트를 거듭할수록 단기적인 성과에 조급해지다보니 점점 끈기가 부족해지는 느낌이다"라는 내용으로 답했다. 효재는 웃으면서 "솝트에서는 열정 있는 팀원들과 함께이기 때문에 프로젝트를 계속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곤 한다. 여기서는 그런 단점을 많이 고치실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고민 상담이었다면 내가 정확히 원했을 답변이었다. 주변에 마음 맞는 사람들 찾을 수 없었고 항상 혼자 하다보니 잘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던 외로웠던 내게... '팀원들 있다고 뭐 얼마나 다르겠어'라는 생각도 조금 들긴 했지만, 효재 특유의 약 파는 듯한 설득력 있는 눈빛과 말투는 나로 하여금 솝트 활동을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04. 상언이형과의 만남
회장단 면접 이후에 1:1 파트장 면접이 있었다. 32기 기획 파트장 상언이형을 그때 처음 만났다. 내 기준에 따르면 정도 이상으로 푹 패인 니트(가디건이었나?)를 입고 있었던 상언이형은 잘생기기까지 해서 나는 속으로 '아 이사람 허수다' 싶었다.
예상과 다르게 상언이형 질문들은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 솔루션이 아닌 문제에 집착해야 된다는 태도, 고객 인터뷰를 중요시하는 마인드셋, 그러면서도 전환율 등의 지표를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식의 테크닉 경시하지 않는 기조까지 모두 질문에서 잘 느껴졌다. 그래서 상언이형과의 면접은 정말 편했다. 내가 경험했던 것들, 실패했던 것들, 그 과정에서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을 격 없이 풀어냈다. 잘 보이기 위해서 말을 과장하거나 꾸며낼 필요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면접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에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언이형의 가슴팍은 여전히 신경쓰였지만 이 사람에게서 기획을 배우면 정말 재밌겠다는 생각에만큼은 확신을 가지고 나설 수 있었다. 이 사람과 지금처럼 가까운 사이가 될 줄은 이때는 꿈에도 몰랐다.
최종 발표 날, 2교시 수업을 마치고 다음 수업을 들으러 캠퍼스를 가로지르던 오후 12시 즈음 하여 합격 문자가 날아왔다. 알바탑과 청년광장 사이를 빠르게 걸으면서 합격 사이트를 조회하던 그때만 해도 솝트가 내 인생을 이렇게나 많이 바꾸어놓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담
내게 솝트를 알려주었던 까까머리 신병 하진이는 지금 1천만원 이상의 월매출 내는 사업을 만들어 키우고 있다. 동시에 경희대학교 창업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는 하진이는 결국 솝트를 하지 않았다.
인액터스 불합격 소식 들었을 당시는 굉장히 어이가 없었지만.. 이때 인액터스 합격했더라면 솝트는 애초에 지원하지 않았거나 지원했어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떨어졌을 것이다. 이때 나를 불합격시켜준 인액터스 임원진분들께 정말 감사하다. 평생을 고맙다고 해도 못 갚을 빚이다.
개그 욕심은 결국 못 버리지 못해서 솝트 지원서에도 적당한 엽사를 집어넣었다. 나중에 상언이형에게 들은 말인데 자기는 김대덕 지원서 사진만 보고 너무 열이 받아서 바로 불합격 처리를 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건 면접 날로부터 1년도 더 지나서 효재에게서 들은 말... 위에서도 언급한 스스로의 단점 묻는 질문에 내가 대답 똑바로 못했더라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합격 의견이더라도 나를 불합격시키려고 했었다고 한다. 정말 창업 하고 싶어하고 경험 많은 거 알겠는데 자기 잘난 맛에 에고 못 버리는 사람이면 솝트에는 절대 안 맞는 사람이라면서,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질문했던 거라더라.
솝트 임원진은 이렇게 리크루팅에 진심이다. 단순히 준비된 질문들 읽고 끝내는 게 아니라,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솝트를 더 나은 조직으로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녹여낸다. 나도 33기 리크루팅 해봤지만 이틀동안 수백명의 사람들 면접 보면서 이런 관점을 유지하는 거 정말 어렵다. 효재 이야기 들으니까 내가 진행했던 리크루팅도 반성할 부분이 많다 싶었다. 하여간 솝트에는 정말 여러모로 멋진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회장단 면접의 면접관이었던 효재와 보미는 함께 솝트 31기에서 만난 팀으로 창업을 해서 지금도 사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유명 AC인 더벤처스로부터 시드 투자를 받기도 했다. (33기만 제외하면) 나의 영원한 회장 부회장 그리고 ZOOC팀 항상 응원합니다!
내가 사랑하고 의지도 많이 하는 상언이형은 사이드 프로젝트 느낌으로 잠깐 창업을 했다가 지금은 펄어비스에서 주니어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금요일 오후 10시에 퇴근하면서도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형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멋있는 사람이다 싶었다.